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문단 편집) == 전범 == > 테일러가 개정진술에서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가 전쟁범죄가 유죄라고 언급한 일은 얼마 안가 부정되거나 망각되었다. 이 일은 역사가들이 30년 후에나 역사가들이 다시 밝혀내었고 1990년대와 그 이후에나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국방군과 친위대가 유죄라는 선언은 동부전선을 낭만화하는 자들에게 억압되었다. > >테일러는 자신의 기소를 증명할 증인들을 출석시켰다. 첫 번째 증인은 아인자츠그루펜 D의 지휘관이었던 [[오토 올렌도르프]](Otto Ohlendorf)였다. 올렌도로프의 허가 아래 1941년 6월과 1942년 6월 사이에 90,000명이 아인자츠그루펜 D에 의해 학살되었다. 올렌도르프는 유대인을 비롯한 남녀와 어린이를 학살하고 사체 및 유류품을 처리한 일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세히 증언했다. 올렌도르프는 질문을 받자 독일 국방군이 학살 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힘러가 제게 러시아 전역 초기에 히틀러가 이 임무[유대인과 공산당 관련자들을 절멸하는 임무]를 집단군 회의에서 지휘관들에게 발언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중략) 그리고 지휘관들이 이 임무에 필요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독일 국방군은 학살을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학살의 정신도 가지고 있었다. 올렌도르프는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심페로폴에서 육군 사령부는 이 지역의 아인자츠코만도 부대들에게 절멸 작업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는데 왜냐하면 그 지역 여성들이 위협이 되고 육군이 사용할 가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페로폴 근처에서 활동하던 제11군의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이후의 증언에서 그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당시에 그가 친위대 장교들과 충돌하긴 했지만, '''그 일은 학살 희생자들의 손목시계들을 누가 가질 것이냐를 두고 다툰 일이었다. 만슈타인은 그 다툼에서 이겼다. 올렌도로프는 이렇게 증언했다. "육군의 요청으로 시계들을 전선에 있는 병력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1058910|동부전선의 신화: 미국 대중문화의 독소전쟁]] [[https://archive.is/qCmxu|아카이브]] (번역가: РККА☭ ) > 유대인은 유럽에서보다도 강력하게 소련의 정치 지도부와 행정부의 모든 핵심 요직을 움켜쥐고 상업과 교역을 관리하며, 게다가 모든 소요와 일어날지 모를 봉기의 핵을 이룬다. 유대인-볼셰비키 체제는 단번에 영원히 절멸돼야 한다. 그 체제가 다시 유럽의 생존공간을 침번해선 안된다. 독일 군인은 볼셰비키 테러의 정신적 보균자인 유대인을 가혹하게 응징할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이 가혹안 응징은 거의 다 유대인이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모든 봉기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 >1941년 11월 20일 11군에 내린 지령.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19462|“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산파 바실 리델 하트: 한 군사학 구루의 명예와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 그 엄청난 능력과는 달리 인성은 '''야비한 기회주의자'''라고 비판받고 있다. 특히 친나치 문제와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루는 연구에서 이런 평가가 강하게 제기된다. 딱히 적극적으로 족치지는 않았기에 교수대로 가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족치는 걸 보고 히틀러가 좋아한답시고 딱히 말리지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잘한다며 히틀러에게 기었던 기록은 수두룩빽빽했다고. 그렇게 알아서 기는데도 히틀러가 만슈타인을 싫어한 것도 사실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 원하는 바를 더욱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을 남긴 적이 있다. 또 만슈타인과 같은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핫소 폰 만토이펠|만토이펠]] 또한 "히틀러는 국방군 장성이 자신 앞에서 주눅 들거나 위선적으로 굽히는 모습 없이 고참 병사처럼 당당한 태도로 거짓 없이 말하면 만족스러워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만토이펠은 실제로 히틀러 앞에서도 이를 항상 실천했고, 때문에 거의 항상 그의 말에 반대 의견을 따박따박 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즉, 만슈타인이 아무리 히틀러 앞에서 기는 척 해봤자 그런 태도를 싫어했던 히틀러 입장에선 저 모습이 절대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에 확신을 준 셈. 때문에 만슈타인은 1943년 겨울의 동프로이센에 육군 고위 장성들이 소집된 한가운데서 '총통 각하께 충성을 바칩니다!'라며 일어서서 외쳤다가 차디찬 히틀러의 시선은 물론, 이후 따로 히틀러에게 불려가서 엄청난 질책을 받아야 했다.[* 물론 장성들의 사기 진작과 충성 맹세를 위해 집합시켜 놓고 최고위 장성을 불러다가 호통을 쳐댄 히틀러의 삽질도 삽질이지만, 그만큼 만슈타인의 후빨이 씨알도 안 먹혔다는 걸 잘 말해주는 일화라 볼 수 있다.] 이 장면을 기술한 <히틀러 북>을 보면 히틀러의 측근들조차 이러한 만슈타인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웃듯이 언급하였고, 전술한 대로 국방군 동료 장성들조차 만슈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판을 크게 보고 대규모 작전을 특기로 하다 보니 상급 제대 사령관들에게는 높게 평가받지만 하급 제대 지휘관들이나 사병들에게는 평판이 안 좋았다. --[[우리의 주적은 간부]]-- 남부집단군의 한 장교는 [[리델 하트]]에게 만슈타인이 해임되고 [[발터 모델]]이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며 그냥 집단군 사령관이 교체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한 바가 있다. 당시 만슈타인은 후임인 모델에게 인수인계를 위해 한동안 함께 근무했는데 이때 모델의 휘하로 함께 남부집단군에 부임해 온 젊은 참모장교는 자신에게도 예의 바르게 대해 준 만슈타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만슈타인의 휘하 장병들은 사령관이 교체되는 것에 별다른 아쉬움을 표하지 않아서 의아했다고 한다. 정작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는 [[독소전쟁]] 패배의 주요 원인을 히틀러에 돌리고 있는데, 특히 [[쿠르스크 전투]]에서 히틀러의 공세 중지 명령이 결국 전쟁 전체의 패전 원인이라는 식으로 강조하여 서술하였다.[* 만슈타인의 회고록만의 문제는 아니고 독일 국방군 장성들 회고록의 전반적인 문제다.] 오랜 시간 전사학계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지지를 받아왔고 국내에 출간된 서적들도 비슷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최근 출간된 번역 서적이라도 해당 서적들은 서구권에서 1990년대에 출간되어 최신 연구를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각주에 있는 유명한 전사학자들의 인용 서적들은 그보다 더 오래 전인 1960, 70년대에 출간된 서적들인 경우가 많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전선에 100만을 훨씬 상회하는 예비 부대를 집중시켜 놓고 있었던 상황이고 1943년 3월 말에 울트라 프로젝트 팀의 활약으로 [[에니그마]] 암호 통신문을 해독한 [[영국]]이 [[모스크바]] 주재 군사 사절단을 통해 쿠르스크 돌출부를 공격하려는 독일군의 의도를 전해 주었던 점, 4월에 이미 소련 스파이 루시(Lucy)에 의해 독일군 지휘관들보다 스탈린과 주코프가 성채 작전을 먼저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